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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가르침이 빚어낸 참극, 위플래쉬 그리고 4등

맥주와 팝콘-Movie

by 다락방지기 2019. 9. 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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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겹도록 우리 사회를 가득 메운 키워드가 있다. 서바이벌 즉 생존경쟁이다. 이러한 경쟁적 분위기가 미디어를 뒤덮으며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경쟁과 혹독한 성장과정을 앞다투어 다루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 극한의 고통을 견뎌야하고 성장을 위해 모질고 쓰디쓴 고통을 감내하도록 강요받는 과정. 그리고 대중은 그 결과로 달콤한 감동을 선물 받았다. 어둠의 시간을 지나 그동안의 고통과 독들이 더해져 얻어낸 성공을 보며 우리는 혹독함이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교육이 되고 있다.

  데미안 샤젤 감독의 <위플래쉬>와 정지우 감독의 <4등>은 우리 교육의 잔혹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에 이 영화들은 위험하다. 메세지를 잘못 해석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남 엄마들이 보면 큰일 날 <위플래쉬>

  폭군에 가까운 플렛쳐 교수는 지독한 교육방식으로 상대를 성장시킨다. 폭언은 기본이고 학대까지 서슴치 않는 그로 인해 주인공 앤드류는 큰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성공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마지막을 오해하곤 한다. 앤드류가 격정적으로 드럼을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서 앤드류와 플렛쳐의 화해가 이뤄지고 앤드류의 정점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위 강남엄마라고 불리우는 잔혹한 부모들이 본다면 위험한 영화다. 영화의 메세지는 그것이 아님에도 그 착각을 진리라 믿게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플렛쳐의 가르침으로 인해 앤드류가 타락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마지막 드럼연주 장면에서 앤드류 아버지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그는 아들의 광기어린 눈빛에 좌절하고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 앤드류가 음악을 더 이상 예술이 아닌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예술의 가치를 퇴색시켜 버린 스승과 제자

  플렛쳐 교수의 교육방식은 지독하다. 1초 아니 1/100초까지도 그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 이 영화의 잔혹한 장면이기도한 연습장면에서 앤드류는 수차례 뺨을 맞아 가며 플렛쳐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간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앤드류의 광기는 플렛쳐와 함께한 시간만큼 커져만 간다. 자신이 밀어낸 선임자처럼 자신이 밀려날까 노심초사하고 타인의 실수에 광기의 미소를 머금는 모습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즉, 둘의 교감은 교육의 과정도 예술의 과정도 아닌 것이다. 예술이 가진 유희의 기능은 배제된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써 음악을 사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앤드류는 과연 플렛처를 통해 무엇을 배운것인가?

 

 

난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 하는게 더 무서워 <4등>

<4등>은 어린 수영선수 준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대회만 나가면 번번이 4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준호로 인해 고심하는 엄마는 1등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새로운 코치를 수소문한다. 그리고 새로운 코치 '광수'를 만나게 된다. 광수 역시 코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수영을 그만둔 상처 깊은 선수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준호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자신의 기준에 닿지 못하면 가차없이 매질을 가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준호의 엄마는 그런 매질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1등에 대한 집착으로 그것을 묵인한다.

 

폭력으로 만들어진 성공이 가치 있는가?

  결과적으로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내고 성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자신을 학대한 스승의 호된 가르침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치 있는 결과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의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고발해내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영화 <4등>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영화 프로젝트로 제작된 영화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스승 또는 부모라면 고민해봐야 한다

  <위플래쉬>의 플렛쳐 교수, <4등>의 광수 코치와 준호 엄마는 우리 교육의 자화상과도 같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영향인지 호되게 질책하고 끊임없이 닥달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성장하면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위플래쉬>를 보고나서 상당히 위험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4등>은 비교적 메세지가 쉽게 풀어져 있었지만 <위플래쉬>의 경우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곡해될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분명 <위플래쉬>의 결말을 보고 역시 결국은 따끔한 독침이 성장을 만들어내내 하며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할 스승 또는 부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고민해보길 빈다. 두 영화 모두 성장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이 올바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결과가 비극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한다.

  엄마품에서 뛰놀아도 모자람이 없을 나이의 북한 아이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동작으로 군무를 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가. 그것이 아름답고 좋아보였는가? 그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가? 이 두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다루고 있다. 화려한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학대를 말이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고 교육이 아니다. 학대일 뿐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강요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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