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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의 외침 그리고 메아리, 서태지 돌아보기

판타지아-FantaS..Ear

by 다락방지기 2013. 6. 20.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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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통해 문화와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티스트를 손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비틀즈를 손꼽는게 일반적입니다. 비틀즈는 1960년 영국 리버풀에서 결성된 록밴드로 이들은 다른 음악가에게 음악적 영향을 미친 것을 넘어 1960년대의 사회 및 문화적 혁명을 야기한 록 밴드로 평가받고 있는 신화적 존재이며 실제로 1999년 <타임>지에서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선정된 이력이 있을 정도로 음악의 영역을 넘어 사회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한국에는 비틀즈와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미친 뮤지션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한국 역시 비틀즈처럼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서태지라는 뮤지션이 있습니다. 바로 서태지입니다. 서태지는 1992년 데뷔앨범을 발표하며 한국대중음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 후 데뷔앨범을 포함하여 총 4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후 1996년 1월 31일 데뷔 4년만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였지만, 1997년 은퇴를 번복하고 4장의 솔로앨범을 발표하며 20년이 넘게 현역가수로 활동 중인 뮤지션입니다. 그는 대중음악을 하는 대중가수였지만 그 영향력은 문화를 넘어 정치, 경제적인 면까지도 확산되었고, 우리 사회의 신세대문화의 성립에 이바지한 대표적 뮤지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태지의 등장과 활동과정을 통해 나타난 사회적 변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서태지의 활동시절 중 그의 사회적 파급력이 절정에 달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하 서태지로 통칭함) 정규앨범 1~4집을 중심으로 이 과정에서 서태지의 영향력으로 인해 나타난 한국대중음악의 판도변화 특히 기성세대 중심에서 젊은세대 중심으로 그 중심축이 이동한 과정 그리고 그 과정안에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이념 즉, 헤게모니가 젊은세대의 연대를 통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서태지 Discography


  첫번째, 선을 긋다

    서태지가 데뷔앨범을 발표한 1992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터닝포인트로 기록됩니다. 그 이유는 1992년 이전까지는 팝발라드와 트로트가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를 이루는 음악이었으나, 서태지의 음악이 선보여진 이후로 이 판도가 완전히 새롭게 뒤엎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인해 대중음악을 수요하는 주구매층 역시도 30, 40대 성인에서 10, 20대 젊은 층으로 빠르게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당시의 젊은세대는 고도성장의 과실을 처음으로 향유하기 시작한 세대였습니다. 이로인해 그들은 개성을 원했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자신만의 문화, 동시에 서구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서태지의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음악과 정확하게 맞물렸고 그 결과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단숨에 젊은세대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서태지는 새로운 형식을 가진 음악과 표현을 통해 기성세대는 향유 할 수 없는 젊은세대만의 음악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의 보이지 않는 구분선을 만들어냈습니다. 음악 이외에도 가격표(Price Tag)를 제거하지 않는 패션, 화려한 장신구 등과 같은 액세서리, 기존의 질서나 관습에 반하는 행동양식 등을 통해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잠재되어있던 욕구를 실현시키며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경계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죠. 다시말해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 대중음악은 서태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과 들을 수없는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이것은 즉 신세대와 구세대로 구별짓는 하나의 문화현상과도 같았습니다. 본 챕터에서는 이러한 젊은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선을 긋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서태지의 음악과 활동을 소개하고 이 중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와 2집 <하여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 대중음악 트렌드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다 : 1집 <난 알아요>




  1992년 3월 <난 알아요>가 수록된 데뷔앨범 <Seotaiji and Boys1>이 발매되었습니다.  서태지가 등장하기 전인 1990년 초반의 한국 음반시장은 트로트와 팝발라드이 음악적으로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댄스음악은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완전한 주류계열에 속하지는 못하는 음악장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서태지는 데뷔곡으로 강한 비트의 댄스 선율을 선보였으며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랩이는 생소한 장르를 도입하는 파격을 추구했습니다. 이 결과 그들의 데뷔무대는 음악평론가 그리고 연예평론가들에 의해 기존 주류음악에 편입되기 힘들다는 혹평과 함께 완성도가 낮은 졸작으로 평가받으며 10점만점에 7.8점이라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앨범은 170만장이 판매되며 대한민국에서 데뷔 앨범으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해의 모든 가요 순위프로그램과 시상식을 휩쓰는 등 그 해 가장 성공한 상업앨범의 대열에도 올랐습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4위에 랭크되는 등 음악적으로도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지만 사회적인 부분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기존의 기성세대 중심이 주요 구매층으로 자리잡았던 음악시장에 10대 청소년들을 주요 구매층으로 편입시키는 성과를 보이며 10대 청소년들이 대중문화의 중심축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앨범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데뷔앨범은 음악적으로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면이 도드라졌지만 이들의 비주얼적인 면도 폭발적인 관심을 얻으며 10대 청소년만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흑인풍 헤어스타일과 가격표를 제거하지 않은 의상인데, 이는 기존의 기성세대의 관습에 의문을 던지고 선을 긋는 그들의 문화코드를 단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 됩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비주얼을 통해 이들은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까지 확장시키는 성과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인데, 기존의 주류 음악을 소비하던 부류와 새로운 음악을 소비하는 부류의 차이점을 나타내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며, 이후의 젊은세대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자리잡게 됩다. 또한 서태지는 활동방식에 있어서도 활동중단선언을 통해 기존의 관습을 전면부정하고 저항하는 형태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발표된 음반과 발표될 음반의 공백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규정짓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말해 방송이라고 하는 절대권력이 가수를 불러주면 나가고 불러주지 않으면 나갈수없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처럼 만연해있었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러한 관행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가장 왕성해야했던 활동시기에 다음 앨범을 위한 활동중단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서태지의 돌출행동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거대한 권력에 개인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주관과 신념을 유지한채 행동할 수 있다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거머쥐다 : 2집 <하여가>



  서태지는 1집의 엄청난 성공을 에 힘입어 1993년 6월 2집 앨범   <하여가>를 발매합니다. 이 앨범은 1집 앨범에서 히트요소였던 댄스와 랩을 이어감은 물론 여기에서 한발 더나아가 강렬한 기타사운드와 헤비메탈 곡에서 들을 법한 기타 솔로 그리고 전통국악기 태평소 소리를 삽입하여 큰 화제를 일으키며 다시한번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이들의 인기는 데뷔앨범에서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보이며 한국 최초로 더블밀리언셀러(220만장 판매)를 기록하게 됩니다. 상업적인 성과 뿐 아니라 이 앨범 역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30위에 선정되는 등 음악적인 성과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앨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서태지의 음악에서 사회적 메시지가 전달되기 시작한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전작에서는 음악의 장르적 특성이나 비주얼 등을 통해 파격을 추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데 그쳤다면 이 앨범에서 부터는 개인의 자아를 강조한다거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트랙은 '수시아', '너에게', '죽음의 늪'으로  '수시아'에선 세상의 모든 중심은 자신이며, 다른 누군가에게 이끌려가거나 사로잡힐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결함을 자각하고 자아를 올바르게 형성할 것을 강조합니다. 2집 앨범의 유일한 발라드 트랙인 '너에게'에서는 당시 대중가수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기성세대들의 비판에 대한 서태지의 생각과 함께 자신의 음악을 소비하고 비판의 중심에 서있는 10대 팬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서태지는 이 곡을 발표한지 7년이 흘렀을 때 즉 자신의 음악을 소비하는 10대들이 20대로 성장하였을 시기에 새로운 형태로의 편곡을 통해 다시 한번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죽음의 늪'은 처음으로 사회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한 음악으로 마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늪이라는 은유적으로 표현을 빌어 전달하고 있습니다. 










- 서태지의 선긋기는 한국사회 헤게모니 붕괴의 시작

  헤게모니는 시민사회 내부에서 사람들의 믿음을 조절할 수 있는 국가와 지배계급의 능력을 말합니다.  헤게모니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의 비판적 사유를 방해하며 그 결과 사회구성원이 사회질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끔 만듭니다. 이 결과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지배계급이 특별한 강제성을 띄지 않아도 교사와 언론 등과 같은 유기적 지식인에 의해 자연스럽게 전달되고 유지됩니다. 결국 헤게모니는 하나의 사회를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통치이념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쉽지 않을 뿐 헤게모니의 붕괴는 충분히 가능한데 서태지의 등장으로 나타난 우리 사회의 변화가 바로 그러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태지가 만들어낸 첫번째 소리는 한국사회의 헤게모니의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울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람시의 이론처럼 서태지의 음악을 통해 젊은세대는 자신들만의 연대블록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블록은 지배계층인 기성세대의 하위에서 독립적인 블록 성장하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재밌는 것은 이 과정이 폭력과 시위로 인한 혁명의 형태가 아닌 대중음악이라고 하는 문화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992년 당시 서태지의 등장이 기성세대에게 위기감을 안겨준 것은 물론 자신들이 만들어온 헤게모니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서태지의 영향력은 엄청났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나타난 사회변화의 양상 역시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사실 서태지라는 아티스트의 앨범이 발표되고 인기 가도를 달린 1992년과 1993년은 헤게모니의 붕괴의 시작점이었을 뿐 완벽한 붕괴를 만들어낸 시기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서태지의 음악소개에서도 지적했듯이 93년까지의 두 장의 앨범에서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없거나 미약한 것은 물론 서태지를 통한 젊은세대의 문화현상이 장기적으로 발전해나갈 형태의 것이 아닌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또한 서태지의 등장과 인기를 얻은 과정 속에는 상업주의 메커니즘이라는 자체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즉, 젊은세대들은 기성의 사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만, 자신의 일탈 욕구를 소비행위를 통해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 기반 자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서태지는 기존의 상업주의를 기반으로 젊은세대의 저항적 욕구를 상품화한 하나의 판매자의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복장규제, 가사검열 등과 같은 방송과 심의제도에 대한 타협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 상징적으로는 저항하지만 실질적으로 일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비판과 한계를 종합하여 볼 때 이 시기까지는 서태지에 의해 헤게모니의 붕괴가 전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기보다는 기성세대 안에 속해있던 젊은세대가 연대를 통해 독립적인 블록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보여집니다.

기성세대의 하위에 속해있던 젊은세대가 독립된 하나의 블록으로 분리되어짐



소리 치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서태지는 젊은세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그에게 더 새롭고 혁신적인 음악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서태지는 1994년 세번째 앨범인 <발해를 꿈꾸며>를 선보이게 됩니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을 하는 음악인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기반을 유지하고 발전해야할 대중가수로써 시도하기 힘든 실로 파격적인 음반이었습니다. 서태지는 기존의 댄스와 경미한 수준의 헤비메탈에서 벗어나 당시 국내에선 매우 낯설었던 얼터너티브 락(Alternative Rock) 을 선보였습니다. 얼터너티브 락은 이전의 음악보다 더욱 강렬한 하드코어 성향이었으며 음악의 주제 역시 통일, 교육, 마약, 자아와 같은 무겁고도 파격적인 소재를 전면에 배치하며 또 한번의 혁신을 감행하였습니다. 물론 사회적 메시지를 음악에 녹여낸 서태지의 음악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기존에도 수 많은 락밴드들이 이러한 시도를 꾸준히 해왔고 그러한 주제로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서태지는 대중음악의 중심부에 그것도 가장 상층부에 위치한 이른바 톱스타였다는 점 그리고 그의 음악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들려지는지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분명 최초의 시도였고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서태지의 3집 앨범은 서태지의 음악 수요층을 10대 여성 중심에서 20대 남성까지 아우르는 이른바 젊은 층 전반의 지지를 받는 형태로 발전시켰고, 이러한 음악적 혁신과 문화적 영향력은 95년 4집 앨범 <컴백홈>으로 인해 더욱 더 발전, 확산되었으며 서태지 음악을 향유하는 젊은세대들이 수동적인 문화소비자를 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고 기성세대의 질서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능동적 문화소비자 형태로 발전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능동적인 뮤지션이 속삭이는 자유의 선율 : 3집 <발해를 꿈꾸며>



   1994년 8월 서태지의 3집 앨범에 발표된다. 서태지의 3집은 전작과 달리 대중성을 전면적으로 배제한 실험적인 음악입니다. 이전까지의 서태지 음악이 기존의 대중가요와 매우 다른 성격의 것되 대중이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른바 흥겹게 몸을 흔들고 춤사위를 따라할 수 있는 대중적 코드가 전면에 배치된 음악이었다면, 3집 앨범은 매우 달랐습니다. 앨범의 장르 역시 얼터너티브 락(Alternative Rock)이라고 하는 이름조차 생소한 음악장르에 매우 하드코어한 사운드를 선택하였으며, 음악의 주제 역시 기존 대중음악에서 손쉽게 다루는 사랑과 같은 소재가 아니라 남북통일, 한국교육현실 비판, 마약의 위험성 경고 등과 같은 민감한 사회문제였습니다. 이렇듯 대중성을 완벽하게 배제한 강한 헤비메탈에 사회비판성향이 짙게 깔린 가사들이 난무하는 서태지의 3집 앨범을 받아든 대중은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쌓여진 명성과 인지도는 대중들이 서태지의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고, 서태지의 3집 앨범은 발매 보름만에 130만장이 판매되는 상업적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얼터너티브 락이라고 강렬하고 새로운 장르의 도입으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기존의 10대 열성 소녀팬 중 일부가 이탈하는 결과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반면 20대 남성들까지 확장되는 결과적으로는 서태지의 음악을 지지하는 젊은층의 범위의 확장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습니다. 서태지가 3집안에 수록된 음악을  얼터너티브 락(Alternative Rock)으로 선택한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특성이 3집 앨범의 전체적 성격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얼터너티브는 음악적 장르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 새로운 형식을 취하는 즉, '기존 상황에의 대체'라는 의미로 설명이 가능한 음악장르로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기존에의 순응과 싸구려 사랑타령,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음악장르입니다. 서태지는 이러한 장르적 특성에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곁들여 보다 완성도 있고 시너지 효과가 높은 음악적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서양문화에 저항하는 장르적 특성을 지닌 레게음악을 상투적 사랑이야기로 재해석해 비판받았던 한국의 대중가요와는 분명 다른 노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서태지의 행보는 음악적 변화만으로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서태지는 3집을 기점으로 음악관련 방송을 제외한 일체의 프로그램에 대한 출연을 거부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자신의 상품가치에 대한 희소성을 높이기 위한 판매전략 일명 '신비주의'라고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이 후 서태지는 이러한 행보에 대해 뮤지션이 중심이 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만든 음악을 내가 보여주고 싶은 방식으로 보여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신비주의에 대한 의혹을 일축하였습니다.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다 : 4집 <컴백홈>



   1995년 10월 서태지는 4집 앨범을 발표한다. 94년까지 총 세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늘 새로운 장르와 파격행보를 걸어온 만큼 4집 앨범 역시 한국 주류음악계에 소개된 적이 없는 갱스터 랩과 패션, 안무 등을 중무장해 또 한번의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타이틀곡으로 선정된 <컴백홈>은 당시 청소년 가출이 사회문제로 부상하던 것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곡으로 실제 이 노래를 듣고 가출을 그만둔 청소년의 이야기에 뉴스에 방영되는 등 서태지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을 적지 않음을 다시 한번 입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집 앨범에는 <컴백홈> 외에도 <필승>,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시대유감> 등 음악적 파격과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동시에 선보이는 것이 돋보입니다. 특히 이 중 <시대유감>은 사회비판요소가 짙다는 이유로 사전심의제도에 의해 가사수정 권고를 받았는데, 서태지는 이에 대한 항의에 의미로 아예 가사를 수정하지 않고 그냥 반주곡 형태로 앨범을 발매하여 항의를 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사전심의제도가 폐지운동의 전개에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96년 6월 7일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되는 성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또한 이외에도 문화권력에 대한 저항에 이전보다 큰 힘을 실어 립싱크만을 요구하는 방송사에 대한 항의의 표현으로 아예 마이크를 소지하지 않은 채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음악순위프로그램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특성상 밴드의 실제 연주가 쉽지 않았고, 이에 밴드 출연자들은 출연을 포기하거나 핸드싱크를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러한 관례를 깨고 사전녹화방송 및 이원방송등을 통해 밴드의 실제 연주를 가능하게 하기도 하는 등 방송국 중심의 운영이 아닌 뮤지션 중심의 운영을 선도하였습니다. 이는 이후에 밴드 뮤지션을 넘어서 퍼포먼스 중심의 뮤지션들에게도 일반화되어 한국 대중음악방송의 질향상에 기여하기도 하였습니다.


- 지배블록에 대립하는 연대블록의 형성으로 한국사회의 헤게모니가 붕괴하다

  서태지의 3, 4집은 전작들과 달리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요소가 전면부에 드러나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은 서태지의 지지기반인 젊은세대가 연대를 형성하며 단단하게 다져졌기 때문입니다. 서태지를 통해 젊은세대의 연대블록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다시 서태지의 발전적인 음악에 다시 영향을 미쳤으며 또 그것이 다시 젊은세대의 연대블록을 지배블록과 대립하게끔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젊은세대에 속하는 대중 혹은 기성세대라 할지라도 기존의 헤게모니에 반하는 세력은 이를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패러다임에 대한 반발 즉 헤게모니를 붕괴시키는 행동들을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사전심의제도 폐지 사건입니다.  공윤의 사전심의제도는 기존 제도권의 문화 통제수단과도 같은 장치였으며, 기성세대가 재단해놓은 방식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얼마든지 그들의 입맛대로 뒤바꿔놓을 수 있었던 역할을 했습니다. 즉, 문화컨텐츠를 심사하는 유기적 지식인에 의해 대중문화가 지배세력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고 따라서 이곳을 통해 걸러진 문화컨텐츠들을 향유하는 대중은 심의에 의해 걸러진 문화컨텐츠가 전하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순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세대의 저항을 통해 이 장벽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젊은세대는 자신들의 목소리 그리고 표현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헤게모니 유지의 틀이 무너져 내린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할 점은 그 시기와 주체입니다. 공윤의 사전심의제도 폐지논의가 불거지고 폐지가 이루어진 시점은 서태지가 연예계를 은퇴를 발표한지 6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는 사전심의제도의 폐지를 이루어낸 주체가 서태지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태지는 공윤의 결정에 항의를 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대중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자체적으로 인지하였고 기존에 심의제도에 저항하고자 했던 세력과 연대하여 결국은 공윤의 사전심의제도를 폐지시키기에 이르는 성과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대중들에 의해 얻어진 성과였습니다. 물론 서태지에 의해 시작된 흐름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그 과정 속에서 연대블록이 형성되었고 이제는 그것이 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지배블록)에 대립하는 젊은세대(연대블록)의 등장으로 헤게모니 붕괴


- 한계

  앞서 살펴봤듯이 서태지라는 선구자적 아티스트가 사라진 이후에도 젊은세대는 여전히 연대를 유지하고 지배블록에 대한 저항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는 분명한 성과이자 우리 사회의 진보에 큰 발걸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완벽한 헤게모니의 붕괴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서태지가 가요계를 떠난 후 서태지와 같은 방식을 가진 뮤지션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H.O.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10대의 문제 중 가장 심각하고도 예민했던 학교폭력이란 이슈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가요계에 등장하였고 선풍적인 인기를 이끌어냈습니다. 성공 이후에도 서태지가 그랬듯 경쟁방식의 교육제도, 씨랜드화제사건과 같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들을 자극하며 기성세대와의 간극을 유지하고 10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이후의 동방신기, 빅뱅, 소녀시대 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류라는 커다란 성과를 만들어내고 이전보다 더 넓고 강력한 팬덤을 형성해냈지만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미미합니다. 오히려 경제적 영향력을 더 보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다시말해 표면적으로는 젊은세대가 기성세대와 간극을 유지한채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젋은세대가 지배세대의 하위에 속하는 과거의 구조로 회귀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들의 탄생과 함께 공장에서 상품을 만들어내는 듯한 과정과 흡사한 현재의 아이돌이 큰 원인입니다. 이들은 자연스레 지배블록이 만들어내는 컨텐츠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되고 이를 자연스럽게 대중들에게 전달시키는 유기적 지식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현재 뮤지션들이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세대들만이 수용할 수 있는 음악과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상 젊은세대에게 수익을 창출해내기 위한 지배블록의 헤게모니 일 뿐이라는 것이죠. 결국 서태지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나타났고 지배블록 헤게모니 붕괴에 큰 역할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연대블록이 기성세대가 되어 지배블록으로 전환되었고 독립적인 연대를 형성하지 못한 현재의 젊은세대는 다시금 이전과 같이 기성세대에 종속된 하위단계로 퇴보했다는 것이 한계라고 볼 수있습니다. 


결론은 울트라맨이야!!

    서태지는 우리 사회에 꽤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이로인해 그의 이름뒤에 늘 따라붙는 문화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사회전반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여전히 그가 가진 영향력은 건실하다지만 그것은 서태지만큼의 영향력을 나타낸 뮤지션이 아직 없었기 때문일 뿐이며 서태지 역시 예전의 서태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선  또 다른 서태지를 기다려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서태지는 영웅이었을까? 가끔씩 이런 의문을 갖곤하는데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바로 얼마전에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서태지의 6집 타이틀곡 '울트라맨이야'를 들으면서 였습니다. 이 노래를 수백번도 넘게 들으면서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 포스팅을 하면서 차근차근 가사를 되짚어 보니 문득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곡은 영웅이란 존재를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영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기자신의 능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자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한 질문의 해답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늘 영웅의 존재를 갈망해왔습니다.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의 많은 이들도 그 영웅을 그리워합니다. 그것을 볼때마다 젊은세대로인 저로썬 잘 이해가 가지않아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기성세대들이 갖는 구태의연한 착각일 뿐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세대라고 자부하는  저나 역시도 서태지라는 인물을 영웅시하고 그와 같은 영웅이 나타나기 전에는 문제의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명의 천재가 백 명의 국민을 먹여살린다던 대기업 총수의 말이 우리 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대학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치솟아도 지배블록을 향해 연대를 형성하여 제대로 저항하고 문제제기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지금. 학교안에서 심지어 대학 캠퍼스 안에서도 지배블록에 관한 비판이 조심스러워져버린 지금. 지배블록에 저항하는 의견이라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가는 보수언론이 있는 지금. 이 두터운 유기적 지식인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이 헤게모니를 부숴낼 수 있는 사람은 서태지도 아니고 그 어떤 한명의 영웅도 아닐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블록이 형성한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것대로의 새로운 헤게모니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가 영웅이 아닌 개인이 될 수 있도록 의식개혁을 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보여집니다.


  이 글은 제가 2012년에 썼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올린 글입니다. 사실 서태지의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음악적 행보를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적어보았는데, 다소 문체가 산만하고 긴 것 같아 부끄럽네요. 여하튼 최근들어 음악적 이슈가 아닌 스캔들로만 세간에 화제가 되어 아마도 서태지를 모르고 자란세대에게 그의 모습이 부정적으로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올려보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구요. 아무쪼록 부족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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